* ㅠㅂ나레 210718 회차 자첫나눔 (A열 자리) 과 교환하고 받은 후기 겸 2차창작 소설.
* 연극에서 저 과장된 행동은 무슨 의미일까 중간에 나온 일리아드와 관계없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곳에 나름의 이유를 제멋대로 생각해서 거기 살을 붙였다 ㅡ 고 함.
1
내가 그 남자를 만난 건 자주 가던 술집에서였다.
가로등이 길을 비추는 어스름한 밤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겸 낡은 나무 간판이 이끄는 지하 술집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투박한 시멘트 계단을 지나 그 아래 문을 힘주어 열자 문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그때 내 눈에는 구석에 앉아있는 취객 하나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안면식도 없는 사람을 취객이라 부르는 게 섣부르다 할지도 모르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 말고는 손님이 없던 이 술집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양복을 입은 취객의 옷차림은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문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마티니 한잔을 주문했다. 술집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그 사람뿐이었고, 이 적막한 곳에서 그 취객을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만한 일이 없었으니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가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니 명백히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그의 또렷한 눈빛은 전혀 취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기에 베일에 싸인 그의 정체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건 내 친구 이야기야. 친구 이름이 뭐냐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우리 중 누구도 그 친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거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그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인사를 건네자 그의 이야기가 무작정 시작됐다.
“우리는 그 영웅을 이렇게 불렀지. 아킬레스.”
이 도입부 이후로 그의 이야기는 아마 반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됐을 것이다. 그는 2차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었고, 그가 혼자 떠들고 있던 이야기의 주제는 그의 참전 동료인 일명 아킬레스라는 친구의 활약상인 듯 했다.
내가 궁금했던 건 눈 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였는데, 그에게 직접 이름과 직업을 물어도 그는 그런 시답잖은 말은 할 시간 없다며 일갈했다. 그리고 내 질문이 무색하게 이야기의 내용은 즉시 그의 친구 아킬레스의 모험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어. 그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킬레스는 언제나 앞장서 전투에 나가 가장 멀쩡한 모습으로 전장에서 돌아왔어. 텅 빈 망자들이 날뛰는 지옥 같은 전쟁 통에서 유일하게 인간이라 부를만한 존재였지.”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의 친구 아킬레스는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적의 총탄이 아킬레스를 피해갔고 죽음은 소매조차 붙잡지 못했다. 수많은 적이 아킬레스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전우가 아킬레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전쟁은 언제나 과장된 구전을 이끄는 법이다.
“아킬레스가 적의 참호에 홀로 들어가 동료를 구해 어깨에 들쳐 업고 멀쩡히 걸어 돌아오는 모습을 봤다면 그야말로 신을 믿을 수밖에 없을걸.”
그는 싸움을 묘사하려고 일어나서 양손으로 총을 든 자세를 취해 위에서 아래로 찌르고 옆으로 찔러댔다. 흥분해 마구잡이로 손을 흔들어대는 통에 몸에 부딪힌 낡은 테이블이 흔들거렸다. 그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술에 취해 쉼 없이 떠드는 (어쩌면 전혀 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 아킬레스라는 친구가 뭐 어떤… 신의 가호라도 받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내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휘두르던 손을 애매하게 멈췄다가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양 손바닥을 강하게 부딪혀 짝 소리를 냈다.
“그렇지! 신의 가호! 아킬레스는 신의 편애를 받고 있었어. 그 녀석, 그 녀석이 나타날 때까진.”
그가 ‘그 녀석’이라는 단어를 입 속에서 되새길 때마다 술병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킬레스와 함께 싸운 이야기를 할 때 보이던 호전적이고 활기차던 얼굴에 이제는 약간의 분노와 씁쓸함이 묻어났다. 생각하기 싫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그것이 아킬레스와 대치되는 앙숙의 존재라고 추측했다.
“그 녀석이라는 건, 전장에서 만난 적인가 보군요?”
“그래. 하지만 오늘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가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자 정적이 계속됐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침이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도 어차피 멈추어야 했을 것이다. 주인장도 슬슬 가게 문을 닫으려 준비하는 듯 보였다.
“혹시 이야기가 계속 듣고 싶다면 다음주 같은 시간에 여기 내가 있을 거야.”
그는 자리를 떠나며 작별인사 대신 다음 약속을 잡았다. 솔직히 나는 소년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잔혹함을 직접 두 눈으로 봤기 때문에 전쟁 영웅 이야기를 계속 듣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남자의 이야기에 끌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면, 그저 이 남자에게 끌리는 걸지도.
그가 가게를 나간 후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마신 마티니 값을 계산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건물 밖을 올려다보니 다행히 소나기는 그쳐있었다. 거리에 나오자 느껴지는 비거스렁이에 나는 두 손을 주머니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나는 잠시 뒤로 돌아 캄캄한 가게 입구를 보고는 직감했다. 다음 주 나는 여기 이 낡은 나무 간판이 이끄는 곳으로 다시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밤늦은 시간에 길을 비추는 희미한 빛을 별자리 삼아 여행하는 뱃사람처럼 이동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책상에 앉아 짧은 글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간단한 질문을 적은 편지는 이른 아침에 군에서 일하고 있는 나의 친구에게 전해졌다.
2
다음주, 그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이 술병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모습은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전과 달리 슬픔에 젖은 눈은 술병 안에 스며든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인사 대신 질문을 건넸다.
“그 술병 안에 뭐라도 있어요?”
그는 그제서야 내가 왔음을 알아차리고는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인사도 없이 다시 술병에게 관심을 돌릴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나에게는 굉장히 무안했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술병의 병목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앞에서 살살 흔들며 술병의 투명한 부분을 통해 나와 눈을 맞췄다. 병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이 교차하며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도저히 무슨 행동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테나가 들어있지.”
“네?”
“그리스 신, 아테나.”
아테나, 정의와 전쟁과 지혜 등등 정말 많은 걸 담당하고 있는 신이다. 그런데 술을 담당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치면 디오니소스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나요? 데낄라에 지혜나 전쟁의 신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그는 당황했는지 병 흔들기를 살짝 멈추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 오늘은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는 남은 웃음을 허탈하게 뱉어낸 후에 입가에 남아있던 미소의 잔영을 거두고 장난기 서린 눈은 진지하게 바꾸어갔다. 나는 그가 지난주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갈 준비를 마쳐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긴 이야기를 듣기에 앞서 나는 술을 주문했고, 그는 들고 있던 술병의 뚜껑을 열어 병째로 들이켰다. 장식용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40도는 거뜬히 될 액체를 물 마시듯 목으로 넘기는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잠시 뒤 내가 주문한 술이 테이블 위에 놓이자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격수였어. 마치 사신과 같았지. 아니지, 아니야. 그 녀석도 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고 해야겠군. 파죽지세로 전진하던 우리 부대는 몇 주간이나 폐허가 된 마을 하나를 점령지 못한 채 그 한 명에게 발이 묶였어.”
그가 말하기를 망설이던 적의 정체는 저격수로서 아주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 저격수의 훌륭한 실력은 그대로 아군의 공포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무작정 쏴서 걸리면 맞추는 보병과 달리 적을 지정해놓고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확실하게 목숨을 앗아가는 저격수는 그의 말대로 사신과 같다. 게다가 주민 몇 십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아니라면 마을을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숙련된 저격수를 잡는 것은 벽 속에 숨어 움직이는 쥐를 맨손으로 잡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아킬레스 덕에 사기가 한참 오른 그의 부대는 아마 대응하지도 못할 적의 등장으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무적의 아킬레스를 막아선 또 다른 신과 같은 영웅의 존재.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한 영웅의 이름이 번뜩였다.
“헥토르.”
내가 무심코 꺼낸 말에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나는 내가 그 말을 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들었어요. 두 영웅의 이야기. 아킬레스와 헥토르. 어… 혹시 제가 하면 안될 말을 했나요?”
내 질문에 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오랜만에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단어라 그래. 내 친구는 아킬레스라는 자신의 별명을 꽤나 좋아했어. 그도 그럴 것이 그 애는 일리아드의 팬이었거든. 그랬던 그가 자신의 진정한 적을 만났다 생각했다면 뭐라고 이름 붙였겠어.”
“헥토르라 불렀겠죠. 와 이건 정말로 신화 같네요.”
내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것과 다르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정말로 신화 같았지. 그 일이 일어난 것까지.”
그가 말끝을 흐린 것을 듣고 나는 그가 말한 ‘그 일’이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일리아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사 중 하나,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다. 그가 지난주 이야기를 멈추고 다시 시작하기 망설인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말을 꺼내기 힘들어했다. 그도 그런 자신이 답답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테이블 위에 올린 주먹이 부들거리는 진동에 술병 안의 술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킬레스는 답답해했어. 당장 저격수를 찾을 수색대를 만들자고 지휘관에게 제안했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건 지휘관도 마찬가지였어. 당연히 아킬레스의 제안은 거절당했지. 그런데 아킬레스는 지휘관 몰래 수색대를 꾸렸고 수색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사실을 들키고 말았어. 군인에게 있어 명령 불복종은 아무리 전쟁의 영웅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야.”
그의 친구 아킬레스는 명령 불복종으로 당분간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군법 재판에 회부될 일이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한참 바쁜 전쟁 중에 최전선의 영웅을 재판에 돌리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전우들은 계속 죽어나갔어. 그런데도 아킬레스의 부재에 우리의 지휘관은 어찌할 줄을 몰랐고, 결국 한 명이 나섰지. 우리의 또 다른 용감한 전우,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가 몰래 수색대를 만들어 나선 거야.”
말하던 중에 그는 깊고… 술 냄새가 나는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길게 말해서 뭐하겠나. 수색은 실패였어. 그저 실패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지.”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그 수색의 결과가 어땠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죽음. 애도를 빌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확 들어갔다. 불꽃이 튀어 오르는 그의 눈은 애도를 바라는 것이 아닌 복수를 바라는 눈이었다. 그는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꿀꺽하는 소리는 타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술과 함께 삼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삼키지 못한 분노가 큰 목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얼굴의 반이 날아갔어!”
얼마나 큰 소리였는지 소리를 지른 그 자신도 깜짝 놀라 입을 꽉 다물 정도였다. 나는 주인장의 눈치를 봤으나, 다행히 손님이 우리뿐이어서 그런지 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도 주인장을 향해 사과하는 의미로 목을 살짝 숙이고 나에게도 사과했다.
“젠장, 소리질러서 미안해. 그때만 생각하면 그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그때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왔지만, 그 시체를 본 순간 내 안에 무언가 끊어진 느낌이었어. 그건 아킬레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 녀석과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같이 수색을 떠난 동료가 가까스로 업고 돌아온 그 친구의 숨은 당연하게도 끊어져 있었지. 아킬레스는 원래 눈이 있어야 할 친구의… 총탄이 지나간 그 텅 빈 곳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었어.”
그는 눈 앞에 정말 그 친구의 시체가 있는 것처럼 우리 둘 사이 테이블의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는 부분을 공허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곧 손바닥으로 눈을 감싸 가렸는데,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아 아킬레스 못지 않게 그에게도 친구의 죽음이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킬레스는…”
그는 울컥하며 치미는 감정을 삼키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킬레스는 주저앉아서 바닥에 누인 시체의 목을 떨리는 손으로 받쳐 들었어. 그리고 다른 손으로 피투성이의 머리를 쓸어 내렸지. 아킬레스의 눈물이 친구의 얼굴에 떨어진 후 피와 흙과 섞여 흘러내렸어. 몇 분을 그렇게 있었을까. 아킬레스가 갑자기 하늘을 보고 울부짖었어. 통곡했지. 원래 그의 성격과 어울리게 우렁찼던 목소리 때문인지 통곡하는 소리가 정말 하늘에 닿을 정도로 컸어. 마치 신에게 직접 소리치듯 말이야. 나는 그 순간 아킬레스에게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통곡 소리가 끝나고 거기 남아있던 건 더 이상 내가 알던 전쟁영웅 아킬레스가 아니었어. 거기 있던 건 인간의 모습을 한 복수의 화신이었어.”
3
여기서 그의 이야기를 멈추고 잠깐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그에게 끌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를 처음 만난 그날 밤 궁금증을 떨쳐내지 못한 나는 내 의문을 해결해줄 친구에게 짧은 편지로 한가지 부탁을 했었다. 편지를 보내기 전부터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며칠 후 친구에게서 온 답은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나는 그 남자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아킬레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만난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그 잠깐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나를 처음 만난 그가 고민했던 것처럼. 나의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야 할까.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하지만 이런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말해야 한다. 그의 선택이 어떤 결과가 되었는지 그는 알 권리가 있다.
4
“복수의 화신이요?”
내 질문에 그는 곧바로 답했다.
“그래. 아킬레스의 눈에는 적의가 타올랐고, 적에 대한 저주를 읊조리는 끓어오르는 목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아킬레스는 죽은 친구가 어깨에 걸친 소총을 빼 들고 달려나갔어. 그런 아킬레스를 혼자 보낼 수 없던 나는 그의 뒤를 쫓았는데, 아킬레스는 우리의 전장이었던 시체가 곳곳에 널린 마을 한 가운데 우뚝 멈춰 섰어.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지.”
그가 고개를 살짝 올려 천장을 보고 소리쳤다.
“헥토르!”
하지만 헥토르라는 별명은 아킬레스와 그 친구들이 쓰던 적 저격수의 별명일 뿐, 저격수는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저격수가 보기에 아킬레스는 잘 보이는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소리까지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말 그대로 최적의 표적이다. 뛰어난 저격수가 아니라도 그런 표적의 머리를 조준해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살행위였어. 아킬레스는 분노에 휩싸여 복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거야. 헥토르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지. 내가 아킬레스를 그곳에서 끌어내기도 전에 이미 총성이 울렸어. 전우의 머리에 구멍이 뚫릴 때마다 났던 그 소리가.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어. 늘 미간을 정확하게 지나갔던 헥토르의 총탄이.”
그는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다음엔 관자놀이 부근을 두드렸다.
“아킬레스의 옆머리를 스쳐 지나간 거야. 아킬레스는 귀신같이 탄이 날아온 곳, 헥토르가 있을 위치를 알아보고 시선을 돌렸지. 그러고는 그곳으로 미친 듯이 달렸어. 당연히 나도 아킬레스를 따라갔고. 그런데 거기 있던 적은 우리가 상상했던 헥토르의 모습이 아니었어.”
그는 허탈하게 웃고,
“거기 서있던 건 어린 소년이었어. 많이 쳐도 열여섯, 열일곱 살이었을까. 그때는 생각했지. 저 소년은 헥토르가 아니라고. 그럼 그렇지. 헥토르가 절호의 기회를 놓쳤을 리가 없다고. 그런데 그 순간 소년이 쓰고 있는 전투모가 눈에 들어왔어. 특이한 색과 모양을 한 그 전투모는 분명히 헥토르의 것이었지. 우리가 몇 번이고 놓쳐가며 얻은 헥토르의 단 하나의 특징이었어. 그리고 아킬레스도 그 사실을 알아챈 듯했지.”
그리고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신의 장난일까, 시험일까. 아킬레스는 평소에도 어린 소년들을 상대하기 주저해왔어. 죽은 소년병을 볼 때면 그것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굉장히 슬퍼했지. 그들이 전쟁에 나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어. 그런데 지금 분노에 휩싸여 가장 죽이고 싶은 상대가 소년이라니.”
“그래서 아킬레스는 그 소년을 쐈나요?”
내가 물었다. 궁금해서가 아니다. 물어봐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쏘지 못했어. 방아쇠를 당기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발사되기 전에 결국 손에 힘을 풀었지. 그리고 들고 있던 총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어. 아킬레스는 어린 소년의 어머니를, 아버지를 생각했을 거야. 어린 아들을 전장에 보냈을 그들의 마음을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어린 소년이 살아가야 할 미래를 생각했을 거야. 아킬레스는 앞으로 넘어지듯 숙여서는 구역질을 해댔어. 갈 곳 잃은 분노가 욕지기가 되어서, 그리고 이런 상황에 자신을 쑤셔 넣은 전쟁이 역겨워져서. 헥토르는 그 사이에 도망쳤고 나도 그를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리고 아킬레스는 더 이상 자신을 아킬레스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지. 그는 명령 불복종과 단독행위, 적을 살려 보낸 혐의 등등으로 불명예 전역했는데, 그것도 그나마 전쟁 영웅을 예우해서 내린 처사였지. 이게 내 이야기의 끝이야. 어때, 꽤 허무하지?”
그렇게 아킬레스는 죽었다. 아킬레스가 아니게 되었다. 영웅의 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불명예 전역한 군인이 남아있을 뿐이다. 복수의 서사에서 복수를 포기하는 주인공은 없다. 영웅의 서사에서 헥토르와 아킬레스가 모두 살아 돌아가는 결말은 없다. 헥토르가 살았으니 아킬레스는 영웅의 이름을 버린다. 그리고 살아남은 헥토르는…
헥토르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아킬레스는, 당신은 그 결정을 후회하나요?”
내 질문에 그는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군에 아는 친구가 있거든요. 전쟁 영웅으로 아킬레스라고 불렸고, 어느 마을에서 적을 놓아준 불명예 전역한 군인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 물었더니 쉽게 찾아주더군요. 사진을 받았는데 이거 당신 맞죠?”
내가 꺼낸 사진을 보고 그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듣자 하니 전역하고 나서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일리아드 연극을 하고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면서요. 그래서 궁금해졌어요. 당신과 달리 복수를 성공한 진짜 아킬레스를 동경하는 것이 아닌지. 복수를 포기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일리아드 이야기를 하면서 복수를 성공한 자신을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묻고 싶은 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저한테는 일리아드가 아닌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셨죠?”
그는 그제서야 침묵을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후회하냐고? 그래. 몇 번이고 후회했지. 연극을 할 때면 아킬레스가 복수를 성공한 순간에 이입하면서 몇 번이고 그 소년을 쏘는 나를 상상했어! 내 친구를 그렇게 만든 그 녀석의 머리를 똑같이 만들어주는 생각을 수십 번이고 반복했어! 눈이 파여 들어가고,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뇌수가 튀어나오고, 피가 벽을 타고 흐르는 장면을 수십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풀이했지.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한테, 전쟁한테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도대체 나도 내가 어쩌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 답을 얻을 때까지 연극을 계속하기로 했어. 다시 아킬레스가 되어 복수해보기 위해서. 욕지기가 솟는 걸 참고. 분노에 삼켜져 나를 잃어버리는 그 느낌을 참고. 그래서 매번 일리아드를 연극할 때마다 생각해.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한다고. 이 분노가 그만 나를 놓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말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왜 너에게 일리아드가 아닌 내 이야기를 했냐고?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아? 나에게 후회하고 있는지 물었지, 그러면 너는 내가 후회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는 한 박자 쉬고 한 단어를 덧붙였다.
“헥토르.”
5
늘 나만 있던 술집에 들어와있던 또 다른 손님. 늘 하던 일리아드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한 이유. 그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가 놓아준 소년, 가족에게 살아 돌아간 헥토르. 아니다. 복수했어야 할 그가 복수를 포기하고 아킬레스라는 이름을 버렸듯이 죽었어야 할 내가 살아 돌아간 순간 나는 그 이야기 속의 헥토르가 아니다. 그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수십 번 반복되는 전쟁 중, 수천 개의 전장 속, 하나의 전장에서 한 군인의 자비로운 선택으로 가족 품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었던 운 좋은 소년병이었을 뿐이다.
내가 그 사건 이후 쭉 그에게 나를 놓아준 이유를 묻고 싶었던 것처럼, 지금 그는 그가 나를 놓아준 이유를 찾고자 나를 만나려 한 것이다. 그가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내 물음에 답했으니, 이제 내가 나의 이야기로 그의 물음에 답해줄 시간이다. 그 대답이 그가 찾던 대답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혹시 후에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일리아드 연극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면 직접 물어보길 바란다. 어떤 이유로 아킬레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